한자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다.
그 전에도 시험과목에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과목에 '한문'이 있었다. 따로 한자 학습지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였는지 나는 또래보다 한자를 꽤 알았다.
고2 학기 초, 1학년때 같은 반 친구였던 2~3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먹하던 때의 한문시간. 교과서의 서문이었는지 한자가 꽤 섞여져 씌여있었는데 선생님이 한명씩 돌어가며 읽게끔 발표를 시키셨다. 모두들 한자로 씌여져 있는 부분을 못 읽어서 난감해했는데,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정말 막힘없이 다 읽었다. 어째서지?
이때 느꼈다. '나는 또래보다 한자를 더 많이 아는구나.'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다가오면 다른 과목들보다도 일주일 더 먼저 시작해서 본문을 달달달 외웠다. 외우는게 전부였던 그때 그 시절이었다. 시험이 끝나면 친구들이 전부 나한테 달려와서 내 답과 비교하며 가채점을 하기도 했다. 헷갈릴 법도 한 문제가 한문제씩 나와도 끄떡없이 100점을 맞았으여 심지어 '과목석차 1등, 동점자수 없음'을 발견할 때의 그 희열이란 말도 못했다.
고2 한 학년 시절의 이야기다.
고3이 되니 한문과목이 사라졌다.
그래도 그 1년의 동기부여로 인해 진학하고 싶은 학과가 생겼다는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는데, 바로 한문학과 혹은 한문교육과. 무조건 가고 싶었다. 그렇다면 수능공부 열심히 해서 가면 되는 것을 결국 수능점수는 큰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결국 점수에 맞춰서 한자문화권에 속해있는 중국, 중문과에 입학하게 된다.
나는 이 지점이 내 인생 최대의 실수이며, 후회라고 늘 자책한다.
재수해서라도 서울권이 안된다면 지방권이라도 한문학과에 입학했어야 했는데 그 당시 재수는 정말 실패자의 끝이었던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강단과 용기가 있다면 나도 끝까지 밀어붙혀서 재수했어야 했거늘, 의지가 약했다. 근 20년이 되어가는데도 이 후회의 언저리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내가 좋아한 한자와 중국어는 크게 달랐다. 중국어는 내가 좋아하는 그 한자가 아니었다. 20대 초중반에 나에게도 많은 역사가 일어났고, 그 후 다시 복학해서 4학년 수업을 듣는데 그 중에 '고전문학의 번역'이었나? 과목명은 기억이 안나는데 간략히 설명하자면 중국의 고전들, 예를 들어 논어, 맹자, 시경 혹은 고문진보의 문장들 중 한 문장을 중국어로 읽은 후 번역해서 발표하는 수업이었다. 여기서 나는 또 운명을 마주친다.
중국어로 듣고, 혹은 유창하게 말하는 수업들을 피해서, 단순히 학점 채우려고 들었던 과목이었는데 여기서 내 진로를 다시 확인하게 된것이다! 한자로 된 문장을 번역하는 일이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아, 난 이것으로 밥벌이를 하면 되겠다.'
그때부터 이리저리 검색해보니 고전번역원에서 우리나라의 옛 한자로 된 고전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 혹은 승정원일기 혹은 여러 산문들과 문서들을 번역하고 있었고, 그곳의 산하기관인 고전번역교육원에서 번역할 사람들을 교육해주고 있었다. 관련 대학원을 나오던가, 아니면 교육원에 들어가서 약 5년의 기간동안 수련의 기간을 밟던가였다. 물론 나는 대학원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후자의 방법을 택했고, 입학하기 위해선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내용을 꼼꼼히 보고 읽은 후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결코 만만한 시험이 아니다. 경쟁률이 2:1정도 되지만 이게 낮은 숫자가 아닌 것이 경쟁자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문선생님, 국문학과 학생, 역사학과 학생, 한문학과 학생 등 이미 한자가 무엇인지 접해 본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곳이다.
한번에 합격하지는 못했다. 세번째쯤에 합격연락을 받은 것 같다.
합격 후 4일동안 수업에 나가며 옛 중국 고전들을 수업이 번역하고 발표하며, 시험을 치룬다. 한국고전 번역인데 왜 중국고전들을 번역 연습하냐고? 그 과목들이 기본 베이스다. 조선시대는 중국과 뗄수 없는 관계였으며, 한자문화권이었고 옛 선비라면 사서오경쯤은 우습게들 외우고 다녔기에 그것에 기초해서 분명 글을 썼을 것이기 때문에 그 문법과 분위기를 알려면 중국고전 번역은 필수다. 원문만 놓고도 토를 달고 해석하는 수준이 아주 최고급이어야 하는데 그 경지까지 가려면 정말 무던히 노력해야 한다.
아, 하지만 1학년 2학기였던 2019년도 후반에 임신을 했고, 2020년엔 출산과 함께 코로나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모든 대면수업도 끝이었고, 온라인수업으로 대체되던 때였는데 갓난쟁이 육아하면서 온라인 수업 듣기란 정말.. 뭐라 말로 못하겠다.
지금은 유치원생이 되어서 다시 시작해도 되겠건만, 모든 수업이 오후에 있어서 다시 육아와 부딪힌다. 애를 봐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또 이때쯤 생각했다.
'공부에도 다 때가 있다.'라는 어른들의 말이 정말 사실이었구나.
결국엔 자퇴를 하고 육아에 전념을 하고 있다. 그래도 한자의 끈은 놓고 싶지 않아서 한자능력검정시험이라도 보면서 계속 접하고자 하는데 고등학교때 본문을 달달달 외우던 그 머리와 의지는 어디갔는지, 지금은 머리는 둘째치고 엉덩이가 너무 가벼워졌다. 하하.
글을 마무리 하며,
예전에 sbs에서 하던 예능, <관계자 외 출입금지>였나. 그 프로그램의 한 단편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소개되었는데, 그곳에서 일하시는 학예사 혹은 연구원분들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정말 관계자가 아니면 몰랐은 공간 혹은 일들을 알려주었다. 그때 알았다.
한자만 좋아한다고 한문학과, 한문교육과를 가야한다는 건 너무나 1차원적인 생각이었다는 것을. 저분들도 기본적으로 한자를 꽤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에서 파생되어 한자와 연관된 무언가를 찾아서 업으로 삼으신 것이다. 이 '파생되는 생각'을 난 20대 ~ 30대초에 못한것 같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걸까. 잠시 또 고민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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